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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5.18 민주화운동의 원인과 명칭 변화... (+광주시민군 궐기문, 택시운전사, 위르겐 힌츠페터)

by 소근소근뉴스 2021.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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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월 18일입니다.

 

네. 바로 5·18 민주화운동이 있었던 그 날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해당하는,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광주와 전남 일원에서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중항쟁을 국가 차원에서 기념하는 날입니다.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한 다음 해인 1981년 5월 18일 피해자 집단, 학생, 재야운동 세력이 망월묘역에서 추모행사를 거행한 것이 발단이 되었는데요. 당시 국가에서는 이 추모행사가 재발하지 못하도록 탄압을 가했으나, 5월 계승운동의 일환으로 꾸준하게 실행되어 마침내 1997년 5월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습니다.

 

 

 

<부연 설명>

5·18 민주화운동은 넓게 보면 1979년 12·12 사태 직후부터, 좁게 보면 1980년 5월 18일부터 발생한 전두환 등의 신군부 쿠데타 세력이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입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군부가 군부를 장악하였고,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반란군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습니다.

 

 

12·12 군사반란이 만든 계엄령과 대학교들의 겨울방학, 연말이라는 점이 맞물려 이에 대한 대처는 뒤늦게 나타났으며,

대학들이 개학을 맞이한 3월 이후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졌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으며,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전두환의 군사 독재에 맞서 일어난 시위가 진압군과 격한 대립을 벌인 끝에 광주에 진입하려는 진압군과 광주 시민들의 총격전으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진압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군사정권의 인권 탄압과 민간인 살해 사례로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민주화운동의 원인은?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유신체제가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유신헌법을 민주적인 헌법으로 전환해야 된다는 주장들이 거세지면서, 최규하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금지되었던 개헌에 대한 논의들을 허용하였습니다.

 

그러나 12월 12일에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장인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는데요.

전두환은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군부의 정치 참여가 당연하다는 듯이 여론의 방향을 이끌어갔고, 1980년 5월 전두환은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비상계엄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이 신군부 세력의 정치 관여를 반대하는 10만 명의 시민들이 서울역으로 모여 시위를 펼쳤습니다. 이를 계기로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 확대 조치를 내렸으며,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하면서 헌정중단 사태가 일어납니다.

 

김대중, 김종필 등의 정치인과 학생 및 교수 등 2600여 명이 체포되기도 하였고, 김영삼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추가로 정치활동금지, 휴교령 등의 민주주의 역행 조치가 생겨났고, 이러한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신군부 세력에 항의하고자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5월 18일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시위 도중 무장을 한 공수부대들이 학생들을 구타하고 폭행하며 진압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과한 진압과 군부대의 투입, 시민 살상 등이 5·18 민주화 운동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5·18 민주화운동의 명칭 변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국가의 공식 명칭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는 흐름에 따라 몇 차례 바뀌었습니다.

 

전두환 정부에서는 '광주사태'

노태우 정부에서는 '광주 민주화운동'

김영삼 정부에서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김대중 정부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이 되었습니다.

 

사건의 명칭에서 '광주'를 배제한 것은, 5·18 민주화운동이 지역을 넘어 보다 광범위한 시민의 참여 속에서 이루어진 민주화운동이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시민 혹은 민주화운동 단체, 학계에서는 '광주 민중항쟁', '5·18 민중항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군의 <광주시민군 궐기문>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본인이 알기로는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은 과도정부의 중대발표와 또 자제하고 관망하라는 말을 듣고 학생들은 17일부터 학업에, 시민들은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 당국에서는 17일 야간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일부 학생과 민주인사, 정치인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구실로 불법 연행했습니다. 이에 우리 시민 모두는 의아해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 당국의 불법 처사를 규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 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아! 설마,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벌어졌으니, 우리의 부모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귀를 잘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이 젖가슴을 잘리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도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너무나 경악스러운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 당국은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국에서는 계속 허위 날조, 유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른 방향대로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영화 <택시운전사> 속 "위르겐 힌츠페터"

 

영화 <택시운전사>는 5·18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잘 담아내었는데요.

실재한 역사를 다룬 영화이다 보니, 감명 깊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실제 인물인 '위르겐 힌츠페터'를 빼놓을 수가 없겠죠.

 

힌츠페터는 5·18이 폭도들의 소요가 아닌, '민주화 운동'으로 불릴 수 있게 한 장본인입니다.

 

근데 어떻게 외국인이었던 그가 광주로 들어가서 촬영을 하고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요?

 

 

힌츠페터는 'ADR TV' 소속의 카메라 기자이면서, 도쿄 특파원이었습니다.

그는 1980년 5월 19일 아침, 한국 계엄령 선포 소식과 함께 우연히 라디오에서 광주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이후 민주화가 기대되었던 한국이 왜 계엄령이 선포된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고 광주행을 택합니다.

 

광주로 가는 모든 길목들이 군인들에 의해 막혀있었지만, 그는 거짓말로 겨우 광주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광주에 무사히 도착한 그는 '국제앰네스티' 회원들을 만나 그동안의 참혹한 일들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21일 새벽 4시, 어디선가 들려온 총소리...

 

아침이 되어 그가 본 것은, 건물 안에서 나온 시신 2구와... 건물 안에서 죽어 있는 더 많은 젊은이들을 보게 됩니다.

이 광경을 본 그는 당장 광주를 벗어나려 했지만, 도청 앞에서 일어나는 사건 때문에 뜨지 못합니다.

바로, 군대가 시민들을 조준 발포하는 모습, 구령에 맞춰 "앉아, 쏴"를 하는 모습마저 보게 됩니다.

참혹한 장면을 모두 담은 그는 광주를 빠져나와야 했는데, 자료가 워낙 방대하여 가방 안에 둘 수 없었기에, 중요한 필름 5개를 허리 속에 숨겨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필름을 독일로 보내기 위해 김포공항의 세관을 통과할 방법을 고민했는데요. 그는 공항의 엑스선 투시기를 통과하기 위해 필름을 알루미늄 포일에 싸고 그것을 결혼 케이크에 넣은 뒤 주석으로 된 큰 쿠키통에 넣었습니다.

어렵게 독일에 도착한 필름은, 그날 저녁 독일에 방송되었고, 5·18 민주화운동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힌츠페터는 2003년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하였고, 10여 년 전 광주를 방문하여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손톱과 머리카락 등을 맡겨뒀습니다.

 

1986년 서울 광화문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게 맞아 목과 척추에 중상을 입기도 했던 위르겐 힌츠페터, 그가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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